'사라진 시간'을 연출한 정진영/사진제공=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17살 때부터 영화감독에 대한 꿈을 품었다가 이제 57살. 배우라 불리는 게 천직인 것 같았던 그가 40년 동안 품은 꿈을 풀어냈다. 정진영은 18일 개봉하는 영화 '사라진 시간'으로 관객과 만난다. '사라진 시간'은 의문의 화재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이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게 바뀌면서 겪는 일을 그린다. 미스터리 스릴러 외피를 갖고 있지만 심리극에 가깝다. 감독 정진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신인감독 정진영은 인터뷰 내내 마치 영화처럼 기억이 왔다 갔다 하는 듯했다. 영화와 그가 참 닮았다. 이 인터뷰는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합니다.
-왜 '사라진 시간'을 만들었나.
▶연출을 왜 했냐는 것인지, 왜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것인지. 일단 영화감독은 어릴 적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다. '초록물고기' 연출부 막내를 한 뒤에 안 한 게 아니라 못했다. 지금도 능력이 부친다. 폐가 된다는 생각을 한다. 한다면 망신을 당한다고 생각했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인데, 망신을 당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데 그게 두려우면 어떻게 하냐 싶더라. 마침 아이가 고3이다. 이제 가장으로서 내 일이 끝나가는 시점이다. 그럼 내가 할 일은 뭔가, 나는 뭐지,란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예술가가,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안전하게 살고 있더라. 그래서 홍상수, 장률 감독님의 영화들을 했다.
그렇게 또 다른 독립영화를 출연할 준비하고 있었는데 촬영 일주일 앞두고 엎어졌다. 돈을 못 구했다더라. 허무하기도 하고. 시간이 남아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홍상수, 장률 감독님 영화들을 하면서 영화 본질이 돈이 아니라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시나리오를 쓰다보니 재밌더라. 그런데 그렇게 쓴 건 버렸다. 굉장히 관습적이더라. 굉장히 안전하게 쓰고 있더라. '사라진 시간'은 그래서 그런 생각하지 말고, 망신 당할 생각했으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자, 검열 없이 쓰자고 생각하면서 썼다. 에너지로 가는 이야기.
-'사라진 시간'은 배우 정진영의 삶에 대한 은유로 보이기도 하는데. 빙의되는 삶일지, 남의 삶을 사는 것이랄지.
▶배우로서 내 삶을 담는 건 생각 안 했다. 내 이야기는 일부러 빼려 했다. 내 이야기를 넣으면 자기 연민이 들어갈테니. 굳이 주제를 생각하자면 내가 생각한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와의 갈등이다. 물론 나도 그 갈등을 계속 겪었다. 진짜 나는 뭐고, 그런 것을 여전히 찾고 있고.
그런데 이 영화를 그렇게 봐주는 분들이 있더라. 정지영 감독님이 보시더니 "배우란 게 그런 거 아니냐"고 하시더라.
시놉시스는 빨리 썼다. 지금 영화 그대로 그렇게 시작하고 그렇게 끝나는 이야기다. 왜 그렇게 되냐는 답을 드리기는 어렵다. 황당한 이야기로 시작해 황당한 이야기로 끝난다. 갑자기 시작해 갑자기 끝난다. 내 마음대로 해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시나리오 쓰고도 아무한테도 안 보여줬다. 이준익 감독님이 보여달라고 했는데 안 보여줬다. 충무로 선수들에게 보여주면 고치라고 할 테고, 그러면 고칠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처음 보여준 사람이 조진웅이었다.
-왜 조진웅이었나.
▶처음부터 조진웅을 생각하고 썼으니깐. 안 주면 계속 생각날 것 같았다. 그래서 거절해도 주자, 할 가능성은 몇 퍼센트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초고를 보냈는데 그 다음날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선배라고 괜찮다고 하는 것이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하더라. 그런 식으로 책이 들어오는 게 한 두 개 겠냐고. 자기가 나오는 건 토씨 하나 고치지 말아달라고 하더라.
그 뒤로 이준익 감독님과 김유진 감독님에게 시나리오를 보여드렸다. 뭐라고 해도 안 고칠 것이라고 하면서. 보시더니 좋은 시나리오라면서 그런데 욕 많이 먹을 각오하라고 하더라.
배우들을 지켜보는 정진영 감독/'사라진 시간' 스틸. |
-영화 전반부 선생님 부부 분량은 영화 전체 톤과 다르다. 좋은 말로 다르고, 어떻게 보면 70년대 영화 같은데. 조진웅이 등장하고 나서부터는 리얼하고 미스터리적이고.
▶아쉬움은 있지만 거의 시나리오 대로다. 빙의는 그냥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선생님 부부가 등장하는 분량은 멜로인데 70년대풍으로 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래서 배우들이 대사라도 현대말로 하면 안 되겠냐며 힘들어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자고 했다. 왜냐하면 그 뒤에 형구(조진웅)가 나오면 리얼처럼 그려지니 앞에서도 리얼이면 뒤의 것에 까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생님 부부 역을 맡은 배수빈, 차수연이 "우리 귀신이에요?"라고 묻기도 했다. "아니다"라고 했다. 제일 미안하고 고마운 배우들이다.
-플래시백을 사용하고, 편집으로 더 쪼갰으면 훨씬 상업적이었을텐데.
▶내가 그런 걸 잘 모른다. 미스터리로 풀면 나중에 다 맞아야 한다. 이유들이 영화 말미에 다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계속 변하는 이야기고, 해설을 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냥 이렇게 가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대단한 연출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느낀 대로 투박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촬영감독이랑 달리도 쓰지 말자고 했다. 그냥 놓고 찍자고 했다.
-절이나 수안보 온천 같은 로케이션은.
▶내가 자주 가는 곳들이다. 실제로 시나리오에 담으려 갔는데 공사 중이더라. 그래서 그걸 보고 "옛것이 좋아요"라는 대사를 넣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 형구가 죽인 사람은, 죽지 않은 것인가.
▶왜냐고 묻는다면 "몰라요". 그렇게 답할 수 밖에 없다.
-그럼 왜 그 신을 넣었나.
▶형구의 혼란을 극대화시키고, 그래서 정신병원 가고 그래서 쉬게 하고, 그래야 초희(이선빈)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뒤에서부터 거꾸로 생각한 신이다.
-7억원으로 제작된 영화인데 마케팅은 미스터리 스릴러 상업영화처럼 소개되고 있는데.
▶원래 처음부터 내 돈으로 혼자 하려고 했다. 그래서 사무실도 만들었다. 조진웅이 하겠다고 사무실에 왔는데, 허름한 아파트 4층에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있는 걸 보더니 의아해하더라. "누가 제작해요?"라고 묻더라. 그래서 "나"라고 했다. "누가 투자해요?"라고 해서 "내가 저금한 거 2억 정도로 하려고"라고 했다. 다른 후배에게 제작을 맡기면,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그건 책임 못 진다고 생각했다. 싫었다.
그런데 '대장 김창수' 회식 때 갑자기 조진웅이 벌떡 일어나더니 "진영 선배, 감독하십니다"라고 발표를 해버렸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장원석 대표 들으라고 한 것 같다. 그 뒤에 장원석 대표가 찾아와서 시나리오를 보고 제작을 자기가 하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예산 올리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 이야기가 바뀐다고. 그러면 내가 못 버틴다고 했다. 그런데 에이스메이커에서 투자배급을 하겠다고 하더라. 이게 에이스메이커 첫 투자작이다. 새로 회사를 만들었으니 첫 작품은 실험적인 걸 하고 싶었다고 하더라. 그렇게 다들 조금씩 양보해서 만들게 됐다. 7억 5000만원이 들었고, P&A를 많이 썼더라. 똑같은 금액을 써서 총 제작비가 15억원이 들었다. 27만명이 손익분기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 아까 하지 않았나.
'사라진 시간'을 연출한 정진영/사진제공=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원래 가제가 '클로즈 투 유'였다. 카펜터스 노래고. 그 노래 가사와 이 영화가 잘 어울리는데. 왜 '사라진 시간'으로 바뀌었나.
▶시나리오를 썼을 때 '클로즈 투 유'를 계속 들으면서 썼다. 그런데 이 제작비로는 그 노래를 못 쓴다. 그 맥락이 없는 데 그 제목은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름 그래서 문학적인 제목을 만들기도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제목은 이 영화를 더 제한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우려하더라. 그래서 지금 제목으로 결정됐다. 그것도 이 영화와 맞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한 영화와 남들이 규정한 영화가 다르다.
-집은 실제로 불태웠나.
▶그럴 돈이 어딨나. 2층만 세트로 태웠다. 충북 보은에 있는 실제 집이다. 영화에 송로주가 등장하는데, 송로주가 어디가 유명하나 검색해봤더니 보은이 유명하더라. 그런데 거기에 학교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좋은 곳이 너무 많더라.
영화에 등장하는 그 집은 로케이션 헌팅에서 본 첫 집이었다. 너무 마음에 들었는데 집 주인이 허락을 안 하더라. 그래서 100군데 정도 더 찾아봤는데 그 집보다는 못하지만 제천에서 마음에 든 곳을 찾았다. 그 집에 맞게 시나리오도 고쳤고. 그런데 집주인이 허락을 안 해주더라. 촬영 날짜는 다가오는데. 미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첫 번째 집주인이 허락을 해준다는 연락이 왔다. 너무 기뻐서 부랴부랴 다시 그집에 맞게 시나리오를 고쳤다. 그런데 이 이야기도 하지 않았나. 처음인가. 아, 자꾸 헷갈린다.
-야외 촬영하기에는 밤 장면에서 벌레들이 많았을텐데.
▶푸른기에서 붉은기가 돌 때쯤 영화를 찍었다. 그래서 벌레가 별로 없었다. 이 영화는 가을 겨울에 쓰고, 가을에 찍었고, 겨울에 개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밤이 낮보다 길 때 봐야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벌어질지 아무도 예상 못했다.
-킬리만자로 모텔, 전지현 박지성 박주영 등은 어떻게 떠올렸나.
▶킬리만자로 모텔은 그냥 떠올랐다. 전지현 등은 그 이름을 듣고 다른 사람이 비웃어야 했기에 누구나 다 아는 유명인 이름을 썼다.
-카메오들이 많이 나올 법도 할텐데.
▶일부러 안했다. 그래도 내가 감독 한다니 이런저런 도움을 주겠다는 분들이 많았는데 일부러 안 했다. 처음 연기하는 분들을 썼다. 다 낯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연출을 할 생각이 있는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나는 어릴 적 꿈이었으니 했다. 그런데 또 하나를 만들면, 그것만으로 만들면 안될 것 같다. 그 다음에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걸 잘 모르겠다.
배우는 연기와 캐릭터로 평가를 받지 않나. 감독은 그냥 발가벗겨지는 것 같다. 많은 분들이 양보해서 만든 영화니 좋은 평가라도 받아야 보람들을 얻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서투른 사람이 만들었으니 서투르다는 소리를 듣는 건 당연하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다. 아까 이 이야기 하지 않았나.